남북한 역사 한눈에 톺아보기

한둘기
2024년 10월 30일
[해방 후 ~ 1960년]
8.15 광복
1945년 한반도 사람들은 일제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빠져있었고, 소련군과 미국군 모두 해방군으로 여겨 반갑게 맞이해줬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국이 조선 총독의 항복을 받고 군정청을 설치에 직접 통치를 선포하였다. 미군정의 직접 통치 방침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부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였고,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광복 직후 각지역에 자발적으로 수립된 민간 자치 기구인 인민위원회 등도 강제로 해산되거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한편 38도선 이북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앞장서서 곳곳에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소련은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고 간접 통치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거리에서 나와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
신탁 통치 반대 운동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한반도에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5년 동안 공동위원회가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시행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에 관해 오보를 하면서 신탁통치가 강대국들의 새로운 식민통치라는 뉘앙스로 전해졌다. 때문에 김구와 이승만 등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를 식민 지배의 연장으로 간주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반탁 운동을 펼쳤다. 이에 반해 박헌영 등의 좌익 세력은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취하다가 신탁통치를 빠른 독립을 위한 지원으로 받아들여 며칠 뒤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곧 '신탁통치안 수용' 입장을 밝혔다.

<동아일보가 오보한 신탁통치안> - 사실과는 다르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 한다고 적혀있다.
미소 공동위와 좌우 합작 위원회
1946년 3월 미소 공동 위원회(제1차)가 열렸지만,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의 범위를 놓고 대립하였고,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휴회에 들어갔다.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고, 좌우 합작 운동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 주요 정치 세력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으며, 미소 간의 냉전 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미군정과 우익 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8년 4월 북한에 들어가 주요 정치 단체 지도자들과 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국제 연합이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 데다, 북한 역시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협상은 실직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같은 해 4월 3일 좌익 세력과 제주도 일부 주민들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무장봉기하였다(제주 4.3 사건). 정부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파견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대 내의 좌익 세력이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무장봉기하였다(여수순천 10.19 사건). 이외에도 서울 등의 각지에서 좌익과 우익 단체들이 시위를 하고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등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여수⋅순천 사건> - 진압군이 부역 혐의자를 가려내기 위해 주민을 모아 놓았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로 11월 1일 89명 총살됐다.
남북한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최초의 민주적 선거인 5.10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같은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같은해 9월 9일 북쪽에서는 김일성을 필두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버렸다. 그렇게 남북한은 걷잡을 숭 벗는 갈등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갈등의 결정적 단초는 북한의 지도자부터 시작되었는데, 바로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초반엔 세력이 약하였지만, 소련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성장했고 1948년 북한의 최고 실세가 되어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나서 군사력을 위주로 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일성은 6.25 전쟁 전까지 군사 20만명, 탱크 242대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 반면 대한민국의 사정은 좋지 않았는데, 한국은 민주주의가 갓 뿌리내리기 시작할 시기였고 자연스레 여러 정당이 난립, 정치적 혼란기가 이어졌다. 이에따라 군사도 북한의 절반인 10만명밖에 키우지 못한 상태였다.
<1948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 -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일성, 다음이 박헌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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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쟁 발발
평화 통일은 불가능하고 남한이 군사적으로 약한 상태니 무력 통일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남한을 침략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일성은 소련을 찾아가 남한을 침공하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으려고 갔으나, 제안을 받은 소련의 반응은 의외로 신통치 않았다. 왜냐하면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만약 북한 미국군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대한민국은 큰 문제에 직면한다. 미국이 1949년 6월 갑자기 주한미군을 철수해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방어를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미국은 당시 폐허가 된 유럽의 전후 복구를 지원하여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영향력을 행세할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자본을 들였고, 이에 따라 재정이 부족해진 미국은 점령한지 얼마 안 된 일본을 더 중요하게 여겨 대한민국에서 물러났다. 미국이 애치슨 선언을 한 이후 소련은 북한의 남한 침공을 허가했고, 불과 5개월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애치슨 라인> - 한반도는 포함이 되어있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25 당시 인민군의 남침 상황>
낙동강 방어선 전투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전선은 한달만에 낙동가 라인까지 주저앉았다. 남한의 영토는 순식간에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북한은 이제 경상도만 차지하면 남한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정말 다행인 일이 일어난다. 바로 막상 전쟁이 터지니 미국이 태도를 바꿔 한국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유엔 회원국들의 이사회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서 유엔군을 결성한 후 한반도로 빠르게 지원을 오게 되었다. 한국군은 미군이 충분히 올때까지 낙동강 방어선을 기준으로 방어를 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면 부산이 공격받을 수 있게 되고, 부산에는 가장 큰 항구인 부산항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이 점령당하면 미국군이 상륙할 곳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는데, 놀랍게도 유엔군과 한국군은 이 공격을 다 막아낸 것이다.
<서울 시내로 들어온 북한군 전차>
<다부동 전투(낙동강 방어전)> -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과 미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사진이다.
인천상륙작전
두 달에 걸쳐서 계속 공세를 가한 북한군은 지쳐있었고, 보급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고, 유엔군은 충분한 숫자가 모여 전선을 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엔군 수뇌부들은 어디로 북한을 공격할지 고민에 빠졌는데, 낙동강 방어선을 그냥 뚫고 가자니 너무 많은 희생이 발생할 것 같아 상륙 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이때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총 7만 5천명의 병력을 모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서울로 쾌속 전진하였고, 북한은 이들을 막을 병력이 부족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을 듣고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선을 뚫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의 기적같은 성공으로 9월 28일 우리 군사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10월 말에는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고 있는 군인들>
중공군의 개입
북한을 점령하고 통일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려진 한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무너지고 만다. 당시 중공군의 숫자는 30만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을 합친 숫자의 2배나 되었다. 10월 25일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을 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전선은 뒤로 밀려났다. 이후 흥남에서는 대규모 민간인이 피난을 가는 흥남철수, 1월에는 서울을 다시 뺏기는 1.4 후퇴 등 중국의 인해전술로 전선은 다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공세로 지친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의 반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탈환하게 되고 38선까지 전선을 밀고나갔다.
한편 중공군은 4차 공세 대실패로 위신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5차 공세를 명령했다. 이 공세에서 중공군 5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인이 내려왔다. 이때 유엔군과 한국군은 엄청난 손해를 얻게 되는데, 이 공세 과정에서 발생한 유명한 전투가 바로 사창리 전투랑 현리 전투이다. 특히 현리 전투에서는 한국군 제 3군단이 병력의 60퍼센트를 잃고 군단이 아예 해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파로호 전투 등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대승을 거두는 등 패배하지만은 않았다. 중공군은 또 한번 공세에 실패하게 되었다.
<오성홍기를 들고 참전한 중공군>
고지전과 휴전 협상
중공군의 5차 공세 이후 중국과 미국은 지속된 전쟁에 지쳐갔고, 두 국가는 휴전이라는 공통된 생각을 떠올렸다. 1951년 7월 10에는 양측의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유엔군과 공산군은 의견 차이로 쉽게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2년동안 협상이 지속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큰 공세는 없었지만, '고지전' 이라는 새로운 전쟁 형태가 등장했다. 양측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해 한 뼘의 고지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때 벌어진 전투로 백마고지 전투 등이 있다. 여러차례의 고지전으로 인해 양측은 상당히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몇몇 고지들은 계속된 포격과 폭격으로 민둥산이 될 정도로 황폐화됐다. 작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던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6.25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
전쟁 피해
6.25 전쟁으로 남한과 북한은 큰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명에 달하는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전쟁중에 죽거나 실종되었으며, 이산가족은 1천만명에 달하였다. 유엔군과 중공군 또한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전선이 38선을 기준으로 이북과 이남 전 지역을 모두 왔다갔다 했기 때문에 양측 모두 주택, 도로, 공장, 농경지 등 사회 기반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민간인의 희생도 막대하였다. 국민 보도 연맹나 인민 재판으로 양측의 민간인들은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였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전후 복구와 이후의 역사
북한
전쟁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대규모로 숙청하였다. 또한 김일성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련과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생산과 소비를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다.
북한은 1956년 소련으로 부터의 경제 원조가 줄어들자 경제 건설의 재원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김일성 정부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추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나, 북한에는 과학이나 기술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중을 동원하여 생산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리마 운동'이다. 천리마 운동으로 북한은 제강소와 제철소 등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고, 군수 산업에서 비중을 크게 두었다. 실제로 천리마 운동을 통해 시행 첫해인 1957년에만 공업은 44퍼센트나 성장하고 농업도 성장하게 되었다. 덕분에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1년에 20퍼센트에 육박하였으며, 북한의 1인당 소득은 남한보다 2배 이상 높았다. 그러나 중공업과 군수 산업 육성에 치중한 탓에 북한 주민의 생활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는 단점도 존재하였다.
<천리마운동 프로파간다>
남한
전쟁이 끝난 남한 또한 북한과 마찬가지로 국토가 초토화 되어있었으며, 많은 공장과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전후 복구에 있어서 미국이 경제 원조를 통해 한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제공한 농산물은 식량 부족 문제에 도움을 주었고, 삼백산업과 같은 소비재 산업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국에 의존하는 바람에 경제 자립에 필요한 제조업을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숙청한 김일성과는 다르게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여러차례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3대째 대통령을 이어나갔다. 4.19 혁명의 시작은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발생하였다. 경북고, 대구고 등의 8개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승만이 있는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에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가 계속되던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는 자유당의 승리를 위해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3.15 부정선거) 이를 계기로 마산에서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3.15 마산 의거). 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대에게 총탄을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15 마산 의거 당시 사진>
4월 11일, 마산 시위 때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숨졌다는 것이 보도되면서 당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또한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 이후 귀가 하던 중 폭력배들로 부터 피습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시위의 주체가 지방 고교생에서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뀌었으며, 시위 목적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되었다.
<김주열 열사의 사진> -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모습이다.
다음날인 4월 19일, 부정선거와 여러 만행에 억눌렸던 민심이 폭발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의 대학생들은 물론 중고등학생과 시민들도 거리에 나와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내리고 시위대를 향해 총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계엄령에 시위가 주춤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는 전국적으로 더 번져나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였고, 26일 오후 1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를 통해 하야를 선언하였다.
<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
4.19 혁명 이후 외무부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한국에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인 제1공화국은 1960년 6월 15일을 기점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8월에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지만,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정변에 의해 이 또한 막을 내리게 된다.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 박정희 소장과 오른쪽에 차지철 대위가 있다.
[1960 ~ 1980년]
박정희 전대통령 집권 논란
1960년부터 1980년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한 기간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선출된 때는 시민들의 요구와 사회의 혼란으로 인해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윤보선이 집권할 시기인 1961년 5월 16일-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실각시켰다. 이후 1961년 5월 18일에 쿠데타를 도운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을 20일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했다. 이로부터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그렇게 1962년 3월 22일에는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3년에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되었고,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됐다.이후 재선에 성공하여 6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7차까지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당시 2번 연임이 가능했던 법을 3선 개헌을 통해 연임에 성공하게 됐다. 그럼에도 정권에 불안감을 가진 박정희는 7.4 공동 성명이 3개월 전에 일어나 냉전이 완화되는 시기였음에도 전쟁을 빌미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죽을 때까지 집권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5대부터 9대까지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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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업적 및 각종 사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 주도로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총 7차에 걸쳐 5개년 계획이 실행된 경제 발전 계획을 말한다. 박정희 정부는 경공업을 육성할 계획으로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제2차 경제개발 계획으로는 1967년에 새마을운동을 시행했고, 1972년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목적으로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 1977년에는 자력성장 목표로 제4차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됐다. 이후 1982년, 1987년, 1992년으로 총 제7차 경제사회발전 계획을 시행했다.
경부 고속도로 준공
1970년에는 경부 고속도로 준공식이 있었고, 총 수출액 10억 달러를 달성했으며, 국방과학연구소 설립과 함께 새마을 운동을 제창했다. 이때의 사회 모습이 우리가 기억하고 떠오르는 1960~80년대의 모습이다.
무허가건물 처리
몇 가지 시대상으로는 무허가건물 처리, 상수도 확충 및 정비, 보건의료 사업, 도로 확충이 있다. 당시 지방에서 인구가 유입되어 서울에 무허가건물이 대거 등장했다. 그중 달동네라 일컬었던 도심 외곽의 경사지에는 대규모 무허가건물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도시개발과 충돌을 빚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거를 앞둔 시점에는 무허가건물의 많은 인구를 의식해 호의적으로 홍보하다가 선거 이후 이를 철거하는 입장으로 선회하려던 것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저런 문제를 품고있던 무허가건물은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전역에 철거가 결정됐다. 주변의 목동과 상계동은 대대적으로 행해졌었다.
상수도 확충 및 정비, 보건의료 사업
당시 서울의 상수도 보급률이 60% 정도 였다. 이 때문에 우물과 같은 지하수에 의존할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했고, 동시에 인구는 증가하여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또 하수도 시설계획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청계천 등의 주요 하천은 인근 무허가건물로 인해 오염돼 위생 문제가 심각했다. 그리고 매년 여름에는 홍수로 인한 침수가 반복되었고, 기존의 하수시설은 계획 없이 갖춰진 상태였다. 이에 서울은 1960년 이후 상하수도 설비확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대대적인 계량사업과 건설이 진행됐다. 1960년대에는 설비개량확장이 두 번 시행됐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시설 확장계획에 따라 상수도의 경우 영등포와 선유 등에 새로운 정수장이 건설되는 등, 인구 증가에 맞춰 개선이 이루어졌다.
서울에는 1961년에 단 9개의 보건소가 존재했다. 당시 서울의 초등학생 결핵환자가 45%에 달할정도여서 시민들을 위한 의료 인프라 개선이 시급했다. 이에 서울에서 의료시설을 확충하였고, 연막방역소독도 활발히 했다. 이때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뇌염과 콜레라를 예방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었다. 그래서 연막방역소독 외에도 거주지 주변 풀베기, 우물 및 화장실 소독, 물 끓여 마시기, 비누로 손 씻기가 강조 됐었다.
도로 확충
1960년대 들어서 도심이 과밀화되자 서울의 교통난은 큰 문제로 떠오르게 됐다. 도로는 도시의 현대화 측면에도 중요했던 터라 도로 건설은 폭발적으로 이뤄졌다. 이에 1969년에는 간선도로인 강변북로 건설이 시작되어 1972년에 개통됐다. 이외에 각종 간선도로 건설과 기존도로를 확장하는 사업도 진행했고, 서울 최초의 고가도로인 청계 고가도로를 비롯해 아현고가도로 등 각종 고가도로와 많은 지하차도가 건설되어 서울의 도로망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 강변에 무허가건물이 난립했는데, 이를 일거에 정리하고 교통난을 해소할 수 있는 판단에 보개도로도 대대적으로 건설됐다.
남북관계
1972년 7월 4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통일 관련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및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3대 통일 원칙의 구체적인 내용 중 첫 번째는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이고, 두 번째는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이며, 세 번째는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이다.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북한은 남한의 ‘6·23선언’이 ‘2개 조선’을 획책하는 분열주의 노선이라며 맹비난을 했으며, 이를 빌미로 진행되어 오던 남북대화를 중단하였다. 이때 6·23선언의 내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경주, 한반도의 평화유지, 남북한 간의 내정불간섭 및 불침략, 성실과 인내로 남북대화 계속, 북한의 국제기구에 참여 불반대, 남북한 UN 동시가입 불반대, 모든 국가에의 문호 개방, 평화 선린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추진 등이 담긴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 암살 사건
1974년 8월 15일에는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씨가 사망하였다. 1979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사망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유신헌법으로 인한 혼란함을 해결하고자 살해했다고 한다.
북한 경제 상황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서의 북한은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원수였던 김일성이 집권할 시기이다. 이 시기에 김일성은 군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크기를 키워 위협적인 남한을 흡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섣불리 동시다발적으로 마구 시행했다. 그 중 국방 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군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패권적 혁명전략을 세웠다. 이를 통해 1년 예산의 30%를 국방에 썼다. 또 경제도 키워야 한다 생각하여 경공업 중공업 농업 모두 투자를 크게 크게 하니 몇 년 안 가 경제에 무리가 갔다. 그 이유는 북한의 자원과 자본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김일성은 민족자립경제 노선이라는 국가 건설 노선에 대해 자존심을 부려 계속해서 경제발전을 추구했다. 이렇게 1960년 후반에 접어들어 결국 경제가 침체하였다.
그렇게, 1974년에 1973년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 덕에 남한의 1인당 소득이 북한의 1인당 소득을 넘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을 중단하고 개발 노선을 변경하는 등 노력했으나 나아지지는 않았다. 결국 민족 자립 노선 같은 자존심은 버리고 1970년에 유럽에서 빌려주기 붐이 일어난 것을 이용하여 돈을 빌렸다. 때문에 1975년에 다시 역전되긴 했으나, 생산만 부추기는 김일성의 명령에 이면에는 무역 상대가 없어 적자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로 따라 재고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석유 파동이 발생하여 여전히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 북한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1950년대 중 후반 북한 경제 전체 GDP는 13.7%정도 인데, 1961~70년의 GDP는 연간 4.1%로 9.6p% 감소했다. 또, 1971~1980년의 북한 경제 전체 GDP 성장률은 연간 2.9%로 1960년대의 4.1%보다 1.2%p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1977년 북한은 1960년대 추진했던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을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라는 구호로 변경했다. 북한 주민들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며 자신의 힘과 지혜, 나라의 자원과 설비를 최대한으로 동원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새로운 도약을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이전 북한의 국가 건설 노선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 경제,국방,건설 병진 노선이 있다.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외세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은 경공업, 농업 보다는 중공업 발전을 우선하는 정책이며, 경제,국방,건설 병진 노선은 경제 발전과 군사력 강화를 동시에 병행한다는 노선이다.
[1980~1990년도]
1980년대 초에는 김정일이 북한의 2인자가 되었다. 그때 김일성은 상당히 고령이었기 때문에 실무같은 경우에는 거의 김정일이 담당하고 있었다.
1980년대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개방을 하고 있었지만 북한 같은 경우 소극적으로 개방을 하였다. 이때 북한은 평양을 중심으로 합영, 합작사업을 유치하여 자본주의적 문화와 제도가 북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했다. 평양에 합영,합작, 위탁가공 기업 등을 설립해서 당적으로 통제하였다. 또한 이들이 북한의 경제 정책에 어긋나는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적 행동을 하는 것을 전적으로 막았다. 이로 인하여 이것에 참여한 기업들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해당 정책이 실패 한 것이다.
위와 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완전한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뤄내겠다면서 모든 문제를 북한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식량 생산이나 비료 등의 생산 같은 것들이 처음 목표했던 것들의 50%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 실패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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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실패
이 시기에는 북한에서 다양한 건물들을 짓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류경 호텔과 서해갑문, 순천 비날론연합기업소 등이 있다.
류경호텔
류경호텔 같은 경우 1987년에 착공되어 105층의 외관은 완성되었으나 프랑스와의 공사대금 체불과 계약 불이행으로 1990년 부터 중단되었다. 이후 2011년에 외장공사를 완료했지만 아직까지 운영되지 않고 방치되어있다.
서해갑문
서해갑문 같은 경우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북한 최대 규모의 갑문이지만, 북한의 부족한 토목 기술 때문에 완공 시한을 두차례나 연기했으며, 무리한 공사 추진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건설비용으로 40억달러 이상이 소모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되었으며 대동강 지역의 환경오염을 유발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하자가 있는 사업이었다. 1981년 시작해서 1986년에 완공되었다. 원래 3년 계획이었다.
바닐론 사업 실패
순천 비날론연합기업소 같은 경우 김일성이 매년 10만톤의 비날론(나일론과 비슷한 북한에서 제작한 옷감) 생산을 위해 83년에 약 100억달러를 투자해서 만든 석탄,화학 공장이었다. 당연히 이정도 규모의 공사는 북한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고, 이것에 북한이 1984년 채권을 갚지 않겠다는 디폴트 선언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손실을 감수하고 지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운영하지 않고 방치하다 결국 2009년에는 원래 형체가 아예 남지도 않을 정도로 철거되었다.
KAL기 폭파 사건,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
이외에도 북한은 한국에서 88올림픽을 여는 것에 경쟁심을 느껴서 공산측의 청년 조직등이 참가하는 행사인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약 47억 달러를 투자해서 89년에 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무리한 사업으로 인해 경제적 타격이 큰 상태에서 또 다른 추가적인 지출을 만들어 버렸기에 경제는 더이상 회복하기 힘든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80년대 경제 성장을 우리나라에게 따라 잡혀서 생긴 조급함으로 인해 일어난 일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이런 저런 테러활동을 저질렀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암살 시도하기도 하였고(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 88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87년에 우리나라 여객기를 폭파시키기도 하였다.(KAL기 폭파 사건)
[1990~2010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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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제네바 합의 (1994.10.21)
남북 고위급 회담 (1990.9.4-7),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1991.12.13),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2.1.20)에도 불구하고 제1차 북핵 위기 (1993.3)가 발생하며 미국이 북한 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북미간의 기본 합의문이며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룬다. 북미 양국은 북한 핵 위기를 해소하고 정치경제관계를 정상화하고 핵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위협과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보장, 북한의 흑연감속로를 대체하는 2기의 경수로를 제공,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로 인한 에너지 보충을 위해 연간 50만톤의 중유를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한국 및 일본과 함께 KEDO를 설립하여 협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NPT의 회원국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조약하의 「안전담보협정」 의 규정을 이행하기로 약속했다. 북한은 또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단계적 이행과 남북회담의 시행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2002년 10월, 미국은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 프로그램을 진행시켜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였다는 사유로 중유공급을 중단시켰다. 북한도 중유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거부하고, 동결되었던 핵 프로그램을 재가동시키게 됨으로써 제 2차 북한 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제 1차 핵실험 (2006.10.9)
북한의 1차 핵실험은 함경북도 길주시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에서 행해졌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 전 세계 20여 곳의 지진 관측소가 폭발에 의한 충격파를 감지하여 확인되었고, 추가적인 정보 분석을 통해 핵실험의 폭발력은 5백 킬로톤에 이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보다 앞서 2006년 7월 5일 북한이 강행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압박 차원에서 유엔 결의를 주도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 형식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통과,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 등에 대한 보복으로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추가로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은 이미 핵실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한민국 또한 미사일 이동 장면이 찍히면서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북한의 핵 실험 후 예상 외로 중국은 맹비난을 하였으며, 납치자 문제로 대립하던 일본은 더욱 강도 높은 유엔결의를 주장했다. 미국 또한 북한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했다.
결과적으로 대량살상무기 개발 관련 물자·장비·기술 및 자산의 거래와 이전을 방지하며, 관련 북한 인사의 입국과 경유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로 나타났다.
제 2차 핵실험(2009.05.25)
북한은 1차때와 동일한 장소에서 제 2차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과 한미동맹을 맹비난하며 자위적 핵억제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안 1718호를 복원하는 의장성명을 발표한 이후 더욱 격화되었고, 북한은 4월 14일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비난하는 외무성 성명에서 ‘자위적 핵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해 나갈 것’임을 밝히며 2차 핵실험을 시사하였다.
결국,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국제사회는 한 목소리로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였고 유엔 안보리는 2009년 더욱 강화된 대북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대북제재결의안 1874호를 채택하였다. 미국 정부는 유엔 제재와 별도로 대북제재 조치를 취하였고 우리 정부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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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남한
금강산 관광 개시 (1998.11.18)

1998년 11월에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적 사업으로 2008년 7월까지 해상 및 육로관광 누적 인원이 196만 명에 달했다. 금강산관광지구에는 약 40여개에 이르는 남측 기업들이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였지만, 2008년 7월 남한 민간인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김일성의 유훈으로 시작된 사업으로 북한이 군사항인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 철조망을 치면서도 금강산을 개방한 것은 경제난 해결을 위한 외화벌이 의도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관광은 ‘금강산관광 개발 및 시베리아 공동진출에 관한 의정서’(1989. 1)를 체결한 후 10여 년만인 1998년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하면서 시작되었다. 북한은 금강산 일대를 ‘금강산관광지구’로 지정하고, 「금강산관광지구법」을 채택하여 남북경협 활성화 및 외화 수입 확대를 도모했다. 한국도 민간인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 전까지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적 사업이었던 금강산관광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금강산관광 사업은 1998년에 시작되어 다소의 부침이 있긴 하였지만, 2008년 중단되기 약 10여 년간 운영되었다. 금강산관광은 1998년에 해로관광으로 시작하여 2003년에는 육로관광이 실시되었고, 2008년 3월에는 승용차관광 시대가 열리는 등 관광방식의 다변화가 진행되었다. 관광 일정도 2004년부터 당일 관광, 1박 2일 관광, 2박 3일 관광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관광코스도 초기의 구룡연, 만물상, 삼일포 등에서 해금강과 동석동~세존봉~구룡연의 순환 코스 등이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야영장과 해수욕장 등도 개방되었다. 2008년 7월 중순에는 비로봉 관광이, 7월 말에는 골프장 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특히 총 18차례에 달하는 당국 간 이산가족 교류 가운데 4차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강산에서 이루어져 이산가족 상봉의 공간을 제공하였다. 특히 금강산관광을 통한 각종 법률 정비는 4대 경협합의서와 개성공단과 여타 남북경협의 법·제도화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건과 관광 중단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장기 경색 국면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피격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재발방지 및 신변안전보장 조치를 재개 조건으로 요구하면서 책임 있는 당국 간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북한이 이에 대해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재개되지 못했다. 결국 북한은 2010년 4월 금강산지구 내 남측 시설과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인원을 전원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한 데 이어 5월에는 강산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하여 남측의 관광 참여를 배제하였고, 2011년 11월에 중국을 통한 국제관광을 시작했다.
결론으로는, 금강산관광은 남북 간의 단순 관광을 넘어서 많은 상징적 의미와 성과를 남겼던 사업으로 평가받았지만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신변안전보장과 같은 법·제도적 장치가 미비했다. 또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 중단 이후 북한이 취한 몰수·동결된 투자 자산과 개발 업체의 독점적 사업권 훼손에 대한 원상회복 조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연평도 포격 사건 (2010.11.23)

북한은 11월 23일 우리 영토인 연평도에 대한 포격 도발을 감행하였다. 북한은 연평도내의 군부대뿐 아니라 민가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170여 발의 포격을 자행하였고, 우리 군은 이에 k-9 자주포로 즉각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 포격 도발로 우리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은 6·25 전쟁 이래 한국 영토에 대한 북한의 첫 번째 공격이라는 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를 근저에서 파괴한 중대한 도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국제사회도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등 세계 각국은 북한의 비인간적인 도발 행위에 분노하고 이를 규탄하였다.
사건 경과
연평도 포격 사건 후 정부와 군당국은 연평도 포격 사건의 안보적 교훈에 주목하고 이후 북한의 추가적 도발을 막기 위한 조치에 주력해왔다. 군당국은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교전수칙을 전면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 11월 28일-12월 1일간 서해 인근 우리 영해와 공해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이 실시된 데 이어 12월 20일에는 연평도에서 사격 훈련이 실시되었다. 북한의 포격도발 이후 우리 군은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했으며, 병력 증강과 아울러 북한의 해안포대를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스파이크 미사일의 배치와 같은 대응 장비를 대폭 보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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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내부
3차 고난의 행군(북한측 발표)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계속된 경제난과 기아를 극복하고 사회적 이탈을 막으며, 주민들의 희생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된 단어이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정신’을 강조하며 군인건설자들을 경제건설 전면에 내세웠고, 이 시기 청년들이 안변청년발전소와 원산‐금강산 철도 등을 건설하여 국가에 헌납하는 등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사회적 동원에 참여시켰다. 이후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의 변화를 진단하는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다. 경제 위기로 인해 배급이 거의 중단되며, 주민들이 장마당으로 나오면서 장마당이 경제 활동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그것을 보고 자란 세대 즉, 장마당 세대의 등장을 촉진하였다.
김일성 수령 사망

1994년 7월 8일 14시 북한 1대 지도자 김일성 수령이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인한 사망이였다. 김일성 수령은 1912년생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립 후 6.25 전쟁,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대한민국에게 끝없는 위협을 하여 대한민국 국민 안보 위협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이 취소되고 남북관계가 경색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후계자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010~현재]
김정은 정권의 출범 (2011-2012)
북한의 현대사는 김정은 정권의 출범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2011년 12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승계했다. 김정은은 그 이전까지 국내외에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버지 김정일이 사망한 후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며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김정은은 군사적 권력을 우선적으로 공고히 하여 북한 군부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병진 노선"이라 불리는 핵 개발과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진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핵무기 개발 및 국제 사회와의 갈등 (2012-2017)

김정은 집권 초기부터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2013년 2월에는 세 번째 핵실험을 감행하며 국제 사회의 제재와 비난을 받았다. 그 후에도 북한은 2016년과 2017년 연이어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특히 2017년에는 ICBM 시험 발사를 성공시키면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했다. 이로 인해 국제 사회, 특히 미국과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트럼프 행정부와 북한 간의 설전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대북 제재가 더욱 강화되었지만, 북한은 제재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2018)
2018년은 북한 외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였다. 김정은은 그해 남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 국면을 열었다. 특히,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열린 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에 대한 공동 선언을 발표하며 긴장 완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북한과 미국 간의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김정은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를 논의했으나, 구체적인 합의는 도출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비핵화 협상은 여러 차례의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하노이 회담 결렬과 교착 상태 (2019)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은 기대와 달리 아무런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한 반면, 북한은 일부 제재 완화를 요구하면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다시 미국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이며 군사적 도발을 재개했다. 북한은 또한 새로운 무기 시스템을 시험 발사하며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경제난과 코로나19 (2020-현재)
2020년 들어 북한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북한은 국경을 봉쇄하고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며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중국과의 교역이 크게 감소했고, 이미 국제 제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김정은은 경제 회복을 위한 다양한 조치를 강구했으나, 외부 원조나 지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또한 김정은은 경제 계획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경제 실패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대화 재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과 권력 재편
2020년 김정은의 건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북한 내부의 권력 구조에 대한 관심이 다시 집중되었다. 김정은이 몇 차례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그가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의 여동생 김여정이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여정은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발언과 역할을 맡으며 북한의 주요 정치 인물로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2010년 이후 북한은 김정은 체제 하에서 핵 개발을 지속하며 국제 사회와의 갈등을 이어가는 한편,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체제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남북 및 북미 관계에서는 일시적인 대화 국면이 형성되었으나, 결국 비핵화 협상의 진전 없이 다시 교착 상태로 돌아갔다.